기독교 신앙으로 영화 <어느 가족> 읽기: 어느 가족을 통해 얻는 교훈






1.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은 오늘날 그 의미와 형태에서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더는 남녀로 구성된 부모와 자녀 관계를 기준으로 정상과 결손을 구분하지 않는다. 한 부모 가정이나 소년소녀 가장의 가정, 조부모 가정, 다문화 가정 등이 가정의 한 형태로 인정받고 있다. 인권 사상을 바탕으로 성적 취향에 대한 차별금지를 요구하거나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제 동성 가족도 법적으로 인정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이미 동성 간의 결혼과 그것으로 형성되는 가족의 형태를 법으로 인정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인정되지 않는 가족 형태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가족이 혈연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난 것이다. 예컨대 <가족의 탄생>(김태용, 2006)은 혈연관계로 맺어지지 않은 가족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현대 사회에서 부각하는 새로운 가족의 형태와 그것의 의미를 숙고하게 하였다. 서로의 역할을 다하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서로 도우며 산다면 굳이 혈연관계에 있지 않다 해도 가족으로 보기에 결코 부족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건강 가족과 결손 가족을 구분하지 않듯이 가족의 ‘해체’를 말하는 건 현대사회에서 더는 바람직하지 않고 오히려 가족에 대한 현대인의 생각들이 변하는 중이라고 보는 것이 옳지 싶다. 혈연관계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사랑과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려는 이해관계가 가족 형성 요인으로 작용한 결과이며, 또한 한 사회에서 가족의 형태가 달라서 소외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목적에 따른 결과이다.


2.

이런 상황이 현대인에게 던져주는 화두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서 우선적으로 가족에 대한 생각과 형태의 변화에 있어서 그것의 배경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현실은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분명한 형태를 갖추기 때문이다.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크게 두 가지를 말하면, 첫째, 가족 구성에 있어서 혈연관계가 아니라 공동체 개념이 전면에 나서고 있는데, 그 배경에는 핵가족 시대를 거쳐 온 세대들의 생존전략이 포진해 있다. 입양 가족도 가족의 한 형태로 인정되는 상황에서 부모를 제외하고는 아무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공동체 형태로 가족을 구성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이것은 핵가족이 세대의 특징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당시부터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모습이다. 혈연관계보다 공동체적인 연대의식에 더 큰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둘째, 가족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이유는 가족의 구속력이 느슨해졌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요구되는 각종 구속에서 자유로워지려고 한다. 가족 안에서도 개별성과 사생활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현대인이 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혈연관계보다 공동의 목적과 안전과 친밀감에 대한 필요와 요구가 가족 구성 요인으로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가족을 떠나 사회적 관계에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면서 개별성과 사생활을 보장받으며 사는 것을 더 편하게 여긴다. 


3.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작품 <어느 가족>은 제71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문명사회의 그늘에 존재하는 다소 충격적인 가족의 형태를 제시하였다. 현대 일본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 아베 총리가 작품의 수상 소식을 듣고도 축전을 보내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원제 ‘만비키 가족’의 뜻은 ‘좀도둑 가족’이다. 집과 집 사이에 끼여 있어서 일부러 들여다보지 않고는 존재 자체를 알아보기 쉽지 않고, 집밖이라고는 오직 하늘만 보일 뿐인 허름한 집에서 옹기종기 모여 사는 가족이다. 원제에도 드러나 있지만 이 가족은 동네 슈퍼는 물론이고 일하는 세탁소의 세탁물 안에 있는 물건들을 훔치며 생계를 이어간다. 할머니는 죽은 전 남편의 연금을 수령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전 남편이 죽기 전에 재혼하여 형성된 가족에게서 정기적으로 돈을 받으며 살고 있다. 그야말로 ‘좀도둑 가족’이다. 

영화는 이들이 좀도둑 가족임을 알게 하는 장면들로 시작해서 가족으로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음에도 어떻게 가족으로 구성되었는지를 조금씩 들추어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여느 가족과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다른 어떤 가족보다 더 친밀한 관계를 누리며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아간다. 영화의 말미에 가서는 가족 구성원 각자에게 숨겨진 비밀들이 하나씩 밝혀진다. 과연 이들은 어떻게 가족이 되었고 또 어떤 모습으로 가족으로서 살아갈까? 그리고 사회로부터 ‘가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감독은 이 가족에게 있는 친밀한 관계를 보여줌으로써 현대인의 가정에서 부재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했다. 예컨대 무엇이 존재함을 알리는 방법은 그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거나 그것의 부재로 인해 나타나는 결과를 인지하게 하는 것이다. 존재의 가치와 의미는 그것의 부재로 인해 아쉬움을 느끼게 될 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감독이 취하는 주목할 특징인데, <아무도 모른다>(2004)에서도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허름한 아파트에 숨겨진 비극을 들추어냄으로써 우리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살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알아야 이웃의 비극적인 삶을 알려주었다. <걸어도 걸어도>(2008)는 죽은 남편과 아버지의 기일을 맞이해 가족 관계의 의미를 되새겨보도록 했다. 감독은 이전에도 그렇지만 이번 영화에서도 존재와 부재의 대비효과를 제대로 이용하였다. 

<어느 가족>은 우리 사회의 그늘에 숨겨져 있는 어느 가족이 사는 모습을 양지로 옮겨 놓음으로써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였을 뿐 아니라 가족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의 가족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시사한다. 이를 통해 가족의 의미와 가치를 크게 부각하였다.


4. 

현대인의 가족과 관련해서 혈연관계보다 공동체적인 연대를 더욱 중시하는 가장 큰 이유는 관계 자체로부터 오는 구속력에 의미를 두기보다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것에 대한 기대감에서 비롯하는 자발적인 구속력에 더 큰 의미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혈연관계가 무의미해졌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현실을 직시하고 그에 따른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 구성원이 어느 정도는 서로에 대한 의무감을 느끼고 또 그에 따라 살아가는 건 중요한 일이나, 그렇다고 구속으로 여길 정도로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부부이기 때문에 혹은 부모이기 때문에 혹은 자녀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래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달리 말해서 현대인의 가족에서 부부는 의무감에 따른 구속이 아니라 관계에서 요구되는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켜야 하고, 부모는 자녀를 돌보면서 그들의 필요에 부응하며, 자녀 역시 부모와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필요에 따라 살 수 있는 환경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부부이기 때문에, 부모이기 때문에, 자녀이기 때문에, 형제관계라서 당연히 이래야 한다는 생각과 요구는 가족관계를 스트레스 요인으로 여기게 만들고 또 오랫동안 지탱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좀도둑 가족이라도 이 가족을 보고 감동을 받으며 심지어 그리워하는 까닭은, 이 가족에게는 가족이라서 가져야 한다고 여기는 강제적인 구속력이 없으면서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또 이 가족은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관계에서 남달랐기 때문이다. 


5.

기독교인의 가정은 어떨까? 주님을 가장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서로를 사랑하고 자신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면서 서로를 돌보는 것이다. 비록 혈연관계에 있지 않더라도 믿음 가운데 서로를 사랑하며 또한 서로를 돌보는 관계를 이상으로 한다. 이런 모습을 지향하는 곳이 말씀을 기초로 세워지는 신앙공동체로서 교회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말씀의 기초에 든든히 세워진 교회 공동체는 현대인 가족의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지상주의는 교회를 우상화하는 잘못된 신앙 형태이다. 따라서 교회가 바르고 평안하면 가족이 바르고 평안하며, 교회가 잘못된 길을 가면 가족 역시 그릇된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교회가 바로 서야 할 이유 가운데 하나다. 

과거에는 가족의 가치를 우선시하면서도 교회 공동체에 헌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기복주의 신앙을 양산해낸 주범이다. 그것의 부작용이 오늘날 드러나고 있다. 교회는 가족과 개인의 가치에 비해 차 순위로 밀려났다. 가족의 가치를 교회의 그것보다 우선하는 일은 인간에게서 가장 본능적이겠지만, 기복신앙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듯이, 미래의 차원에서 보면 개인 신앙은 물론이고 가정과 교회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문제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사회 정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기독교인 사이에서 이혼과 그에 따라 가족 구성원이 겪는 고통이 점증하는 이유는 바로 교회지상주의적인 신앙 때문에 그리고 개인 및 가족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면서 교회에 관심을 두는 기복신앙 때문이 아닐지 생각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결과이다. 이에 비해 기독교인이 개인과 가족에 우선적인 가치를 둔 이유는 교회가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임은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교회가 말씀 안에서 바로 설 때 그리고 이런 환경에서 개인과 가정보다 교회에 우선적인 가치가 부여될 때 비로소 개인과 가정이 건강해진다.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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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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