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too를 넘어 예수님의 마음을 담은 with you로!



2017년, 미국에서 해시태그를 달고 “me too” 라는 말이 등장했다. 그때만 해도 이 말이 오늘과 같이 온 사회를 휘몰아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나 역시 기억한다. 초등학교 때 어느 남자선생님은 나를 무릎 위에 앉히고는 이쁘다며 뺨을 비벼댔다. 20대에는 종로 어느 극장에서 스멀스멀 내 다리 위로 올라오던 생면부지 남자의 손, 그것을 밀쳐내고 소리를 질렀다는 이유로 눈총을 받으며 끝까지 영화를 보지 못하고 나와야 했다. 만원버스와 지하철 안에서 밀착되는 순간 느껴지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그 불쾌한 기운에 대한 기억은 끔찍하다. 신학대학원 동아리 MT에서 나보다 10살 이상 많았던 한 남자 선배는 나의 손을 억지로 끌어당겨 자기 옆에 앉게 하고, 분명 싫다는 의사를 말하였음에도 ‘여자가 목회를...’부터 시작해서 여성 비하적이며 성적수치심을 일으킬 수 있는 말들을 서슴치 않다. 더 놀랐던 것은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남자 신학생들이 대수롭지 않게 웃어 넘겼다는 것이었다. 이후에 내가 듣고 본 수많은 사례들을 떠올려보면 나에게 있는 개인적인 기억들은 애교 수준일까? 


그동안 드러낼 수 없었던 목소리들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연극계, 문학계, 정치계 등등의 그 명망 높았던 이들은 어떻게 그런 괴물일 수 있었는지 그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성폭력’ 이라는 단어는 범죄의 언어로, 소수 개인의 일탈적이고 병리적인 행위에 대한 명명으로만 사용되어왔다. 하지만 성폭력의 실상은 대부분 많은 여성들이 일상에서 부딪치고 있으나 남성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담과 같은 것이었다. 여성 5명 중 한 명은 살아가면서 한 번 이상 성폭력을 당한다는 조사가 있다. 폭행과 협박이 수반되는 성추행 가해자 중 70%는 피해자와 아는 사이라는 통계는 여성들에게 너무 아찔하다. 성추행, 강간은 여성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이것이 나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일은 아닐까?’ 라고 묻게 만든다. #me_too 운동을 촉발시킨 서검사는 인터뷰에서 이것이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 8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가해자를 알고 있음에도 여성들이 피해를 드러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자책하거나 숨어버리는 것은 성희롱, 성추행, 강간 이런 모든 것들이 힘의 관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가해자는 그 잘난 한 줌 권력을 쥐고서 피해자의 생존권을 협박한다. 피해자로 하여금 거부할 수 없고 저항할 수 없도록 한다. 그 힘 앞에서 대부분 여성들은 속수무책이다. 피해 여성들은 ‘내가 그 사람과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면...그 자리에 가지 않았다면.....’ 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 외에는 쉽게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다. 가해자가 여전히 권력과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힘이라는 것은 아주 상대적인 것으로 아무리 쥐꼬리만해 보여도 그것으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이와 영향력을 받는 이는 너무 쉽게 갑과 을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성폭력의 문제는 결국 힘(권력)의 문제이며 그 힘으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관계를 계속 유지해가는 사회가 가진 구조의 문제가 된다. 

미국 신학자 제임스 폴링은 그래서 교회 성폭력의 문제를 힘의 남용이자 악용(abuse of power)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me_too 운동은 단지 한 개인이 개인에 대해 행하는 고발과 복수의 의미로만 읽어서는 안된다. #me_too 운동은 폭력적인 힘에 대항하고 저항하는 목소리의 드러남이다. 이 잘못된 권력의 구조를 깨뜨리고 바꾸어 나가자는 외침이다. 더 이상 우리의 자매들과 딸들에게 이런 몹쓸 권력의 위계구조를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여성들의 결연한 의지의 표현으로 읽어야만 한다. 그렇기에 폭로로만 그쳐서는 안되고,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의 위계적 구조를 전복시키는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교회가 삭제한 목소리들

교회에서 아마 이제 곧 종교계에서도, 교회에서도 #me_too 운동의 바람은 불어오리라 여겨진다. 우리는 사회보다 훨씬 폐쇄적이고 위계적인 교회라는 조직 내에서 감히 me too라고 말할 수조차 없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고등학교때 교회에 새로 오신 목사님은 찬양단을 인도하시면서 저를 매우 이뻐해주셨습니다. .. 어느날 억지로 저와 성관계를 가졌습니다. 감히 저항하기 어려웠고 무서웠고 두려웠습니다. ..저도 죽고 목사님도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 들때가 있었습니다. .. 날마다 하나님께서 내게 왜 이렇게 하셨냐고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인생을 포기하려고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계셔도 그런 하나님, 싫습니다” 


위의 따온 말은 필자가 상담한 사례로, 피해자가 출석하던 교회의 목사님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여성 청년의 말을 중략하여 옮긴 것이다. 대부분 피해자가 그러하듯, 이 청년 역시 대학생이 되면서 도망치듯 교회를 나왔고 그 상처를 가슴에 품은 채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교회는 그녀에게 말할 기회를 주어야 했다. 그 속에서 상처를 치유하고 가해자를 벌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감히 그것을 상상할 수 없었던 피해자는 숨어 들었고, 그녀의 이야기는 지워졌으며 아마도 다음의 또 다른 피해자를 낳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이는 기독교 역사에서 늘 행해졌던 작업이다. 교회와 신학은 그녀들의 목소리를 지우고 그녀들의 흔적을 없애고, 세상과 똑같은 논리로 그녀들을 가두고 침묵하게 하였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의 합리화는 계속되어져왔다. 남성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에 의한 성서 해석과 역사의 기록과 교회의 치리는 늘 이것을 정당화시켜왔다. 전통적인 성서해석은 폭력을 당한 여성들에게 고통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속죄의 신학을 말하며 그녀들을 침묵케 하였다. 다말, 우리아의 아내, 베냐민 지파 여성에 대한 성경 기사와 그것을 해석했던 기록 대부분은 그녀들의 고통과 처지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성들이 마치 자신의 재산을 빼앗긴 것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듯이 기록하고 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다. 성령의 열매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덕목을 가르치며 여성들에게 더욱 잠잠하며 순종할 것을 강요해왔다. 또 뻔뻔스럽게도 교회는 용서의 신학을 말하며 피해자들에게 가해자를 용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것이 교회의 거룩이고 덕이라고 말하여 왔다. 


기독교의 정신, me too 운동과 with you의 정신

에릭 프롬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층은 병든 사회에 깔려 아우성치는 민중을 향해 '모든 것이 정상'이니 '가만히 있으라'고 윽박지르는 사회라고 하였다. 그래서 비정상이 정상으로 뒤바뀌고 정상이 비정상으로 매도되는 이런 현상을 '병리적인 정상성‘이라고 불렀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병리적인 정상성‘을 드러내는 집단 중 한 곳은 교회다. 소수의 성직자가 다수인 교인을 향하여 모든 것이 정상이니(하나님의 뜻이니) 가만히 있으라(침묵하고 순종하라) 고 외치고 있다. 모든 교회가 그렇다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려는 의도는 없다. 다만 점점 더 많은 교회가 이 문제 앞에 침묵하고 굴복하지 않도록 이제라도 용기를 내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고 싶다. 목회자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 생겼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이 가진 나쁜 욕망과 죄인됨을 드러내는 몇몇 개인의 일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나도 죄인인데, 우리 중에 누가 죄인 아닌 사람이 있겠는가, 라며 피해자에게 침묵하고 가해자에 대해 입 밖에 내지 말라고 말한다. me too의 외침은 이런 범죄를 보고도 묵인하며 가해자의 편에서, 가해자의 편을 드는 교회의 입장과 생각에 순응하였던 우리의 비겁함과 용기 없음에 대한 우리 모두의 반성이 되어야 한다. 환부는 오려내야 새 살이 돋는다. 한국교회의 환부를 도려내기 위해 여성들은 피해를 감수하며 침묵을 강요받았던 교회의 명령들을 더 적극적으로 발설하여야 한다. 그리고 누구보다 용감하게 저항하고, 대항해야 한다. 불의를 말하고 잘못된 권력 앞에 항거하였던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이 아니던가? 

보다 전복적으로 성서를 읽어야 한다. 다말의 이야기, 바로의 집에 강제로 들어간 사라의 이야기, 우리야의 아내와 베냐민 지파 여인의 이야기 등 그녀들이 당했던 고통에 대해 먼저 드러내고 함께 아파하고 이해하는 읽기를 하여야 한다. 그 시대 공동체는 그녀들의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했다. 오늘 교회도 피해자들의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더 크게 회개해야 한다. 한 아이가 교회에서 목사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신음하며 울고 있을 때, 우리들은 무엇을 했는가? 그렇기에 우리는 더 크게 손을 맞잡아 연대함으로써 여성들의 목소리로 이야기해야 한다. 교회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한다. 피해자는 따뜻한 치유를 받을 수 있게 하고, 가해자는 정당한 치리와 징벌을 받도록 해야 한다. 그 이후에 비로소 ‘회복적 정의’의 정신으로 가해자 또한 포용해야 한다. 교회야말로 진정한 치유의 공동체이며 정의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me too 운동을 새롭게 바라보자. 그것이 말하고 있는 것이 단지 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악용되고 뒤틀린 힘과 권력과 구조의 문제임을 인식하자. 그것을 바꾸어 나가기를 함께 기도하고 외쳐 나가야 한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채찍으로 내리치며 쫓아내셨던 예수님의 정신은 오늘 교회에서 힘을 사용하여 교회 위계에서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여성의 가장 약한 부분인 성에 대해 폭력을 가한 이들을 쫓아내는 것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이제 교회 내에서 우리도 여성과 남성 가릴 것 없이 피해자들의 울음에 with you라고 응답하자. 언제나 가장 연약한 자와 함께 울고 함께 외치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이 운동이 기존 권력의 구조를 깨뜨려가는 발화점이 되기를, 평등하고 개방적인 새로운 교회 구조를 만들어내는 마중물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권미주: 예장 통합 소속 목사로서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목회상담학 석사, 박사 과정을 공부하였다. 2000년대 초반 기독교여성상담소에서 일하면서 교회내 성폭력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꾸준히 그런 피해자들을 만나고 상담했으며,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목회적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예장통합 교단 '목회자 및 교회 직원의 성적 비행 예방을 위한 의무교육 및 교육과정 개발 연구위원회' 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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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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