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교회’가 찬양하지 않는 6가지 이유





기독교 집회에 참석하면서 가장 좋은 것 중 하나가 찬양이다. 매해 열리는 G3 컨퍼런스에서 회중 찬양의 몇 곡은 그대로 기억하기 위해 녹음하려고 애쓴다. 이번 주에는 T4G 컨퍼런스를 생방송으로 듣는데, 일만 여 명의 사람들(남성이 대다수다.)이 열정적이고 담대하게 부르는 진리의 찬송가에 감격했다. 지난 11월에 나(Josh Buice)는 런던의 Metropolitan Tabernacle(찰스 스펄전을 비롯해 영국의 유명 목회자들이 사역했던 침례교회 – 편집자 주)에 갔는데 거기 모인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 주님께 찬양을 드리는 데 감동 받았다. 그곳에는 환상적인 조명, 스모크 머신도 없었다. 기술적 효과도 최소한으로만 사용될 뿐이었다. 아들의 보혈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교회는 주일에 찬양하지 않는 걸까?

교회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복음을 찬양하는 것이다. 다윗은 시편 9편 11절에서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라고 하였다. 확실히 다윗은 그 중요성을 이해했지만 슬프게도 오늘날의 교회는 영광의 주님을 찬송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복음주의 교회 예배당 대부분이 주일에 조용한 걸 보면 이건 사실인 것 같다. 이에 왜 교회가 찬양하지 않는지 6가지로 제시해 보았다.


남성들이 찬양하지 않는다

슬프게도 남성들이 찬양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이다. 대개 교회에는 남성보다 여성의 출석률이 높을 뿐 아니라, 출석하는 남성들도 회중 찬양하는 동안 그 자리에 조용히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찬양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찬양의 흐름이나 제자도 부족이 이유일 수 있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남성들은 오늘날 교회에서 찬양하지 않는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하지만, 해답은 실용적인 방법이나 설문조사에 있지 않다. 성경적 제자도와 적절한 예배 곡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에 있다. 목회자 컨퍼런스에 가서 남성들이 하나가 되어 목소리 높이는 걸 들으면, 정말이지 감격스럽다.


교회가 찬양을 잘하는 특정인들에게 찬양을 맡겼다

주일에 교회가 찬양하지 않는 한 가지 이유는 교회가 찬양의 책임을 전문가에게 넘기기로 했다는 데 있다. 찬양대와 찬양팀은 주로 교회의 예배에서 찬양의 책임을 맡고 있다. 찬양팀에서 소리가 큰 음악을 끄고 드럼을 치지 않고, 기타의 플러그를 빼고 싱어의 마이크를 없애면 결과가 여실히 드러난다. 주일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문가들’이 찬양하는 동안 찬양의 가사를 중얼거린다. 우리는 가사를 중얼거리라고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부르심 받았다. 입술로 조용하게 중얼거리며 찬양할 수는 없다.


찬송가의 자리를 가벼운 찬양이 대신하게 되었다

예배에서 새로운 찬양을 한다고 해서 잘못되거나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Keith나 Kristyn Getty와 같은 현대 찬송가 작곡가와 새로운 찬양을 쓰는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한다. 찬송가에 수록된 대부분의 찬송도 예전에는 새로운 노래였다. 성경말씀 외의 모든 노래는 사도가 아니라 목회자와 신학자, 학자, 음악가들이 썼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래된 찬송으로 곡들을 제한하는 것은 비극일 수 있다. 그러나 깊이 있는 가사와 적절한 음악적 편곡을 담고 있는 신학적으로 풍성하고 훌륭한 찬양들이 대개 가벼운 찬양으로 바뀌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가벼운 찬양은 확실히 예배에서 필요한 신학적 깊이가 떨어진다.

“어찌 날 위함이온지(And Can It Be)”는 “주의 이름 높이며(Lord I Lift Your Name on High)”로,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가 크리스 톰린(Chris Tomlin)으로 바뀌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CCM 차트 상위에 올라간다고 해서 예배에 적합하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배에서 찬양을 정할 때 소통의 신학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매주 새로 나온 최신 찬양이 계속해서 사용되는 동안, 수백 곡의 좋은 찬송가들이 조용히 책 속에 갇혀 있다. 예배 곡을 선택하는 것은 중요한 임무이고 목회자의 설교와 맞물린다. 오늘날 예배에서 주로 새로운 찬양을 부르는 것에 대해 데이비드 고든(T. David Gordon)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9세기에 동방정교회, 가톨릭, 개신교, 또는 부흥운동 등 이전 세대의 교회들은 모든 문화권에서 이전부터 존재하던 기도문과 찬송가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최고의 예술가들에게 훌륭한 전례형식의 표준에 추가하는 것을 고려하도록 권장했다. 다시 말해, 새로운 형식의 찬양을 추천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전통적인 것이 아니다. 오래된 형식의 사용을 배제한다는 면에서 보면 현대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오늘날 찬양은 대부분, 또는 모든 경우가 동시대적이어야 하는가?” [각주:1]


가정에서 찬양하지 않는다

가정예배는 한때 신앙을 고백하는 기독교인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오늘날 바쁜 일정과 기술들이 가정예배 시간을 차지했다. 그래서 주일에 복음주의 교회에 오는 대부분 가정은 한주 내내 가정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 없다. 간단하다. 가정에서 찬양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서도 열정적으로 찬양할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소년 야구리그 코치가 아들이 속해 있는 팀에게 자주 물었다. “너희 집에서는 야구를 하는 사람이 몇 명이지?” 핵심은 일주일에 단지 한 번이나 두 번 연습한다고 실력이 좋아지길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정 예배는 회중 찬양의 토대를 쌓고 존중하는 데 필수적이다. 가정 예배는 또한 주일 예배 때 부르는 찬양과 친밀할 수 있게 하고 신학을 가르치도록 도울 뿐 아니라 온 가족이 찬양을 암기하는 데 도움이 된다.


반복과 진행, 절정 부분에서 길을 잃는다

예배 때 부르는 현대 찬양의 많은 경우가 어색한 순서로 되어 있어서 찬양 진행과 최고 절정 부분에서 부르기 어렵다. 특히 남성들한테 힘들다. 만약 교회가 복음보다 절정에 중점을 둔 음악 순서와 음악 표현에 마음을 쏟는다면, 정말 큰 문제이다. 사람들이 찬양하기를 바라지만, 이는 모든 사람들이 전체 과정에 집중하여 단순한 감정적 행위뿐만 아니라 제자도와 학습 도구가 되기를 바란다. 마크 데버(Mark Dever)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성경적 정확성, 하나님 중심, 신학적·역사적 전개, 나 중심의 부재, 가사의 어조를 보충하는 음악, 이런 것은 찬송가이든 합창이든 좋은 찬양 예배라는 뜻이다.” [각주:2]

현대 찬양은 “7-11 songs”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냈다. 이런 곡들은 종종 반복을 많이 사용한다. 만약 7분 분량의 노래에 딱 두 줄의 가사만 여러 번 반복된다면 예배에 가장 어울리는 곡이 될 것 같지는 않다. 현대 찬양에서 많이 부족한 것 중 하나가 시적 요소이다. 성경의 시편을 읽고 교회 역사 속 찬송에 대해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곡과 성도를 연결할 수 있는 시의 문법적 요소를 종종 사용하고 있다. 시와 잘 짜여진 가사는 자연스럽게 진행되어 사람들이 곡조의 변화를 빠뜨릴까봐 걱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부를 수 있게 한다. 자연스럽지 못한 곡은 영과 진리로 질서의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이끌지 못할 수 있다. 


미디어에 마음을 빼앗긴다

혁신적인 미디어 기술은 예배에 훌륭한 도구로 사용되지만, 말씀이 찬양과 잘 맞지 않으면, 성도에게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찬양하지 않는 성도에게 일으키는 큰 문제 중 하나는 예배에 미디어 기술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프로젝터가 빨리 돌아가거나 어색하게 비추면, 성도가 찬양하지 못하도록 마음을 빼앗을 수 있다. 요약하자면, 미디어 기술과 기술 진보가 회중 예배에 강력한 도구일 수 있으나, 또한 큰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목사와 교회 리더들은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열정적으로 올바르게 예배하기 위해서 매주 좋은 찬양을 선곡할 책임이 있다. 우리가 찬양하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교회에 끊임없이 여성 성도들의 목소리만 들리고, 대부분 조용하기 만한 이유를 풀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종교개혁은 일상적인 언어로 성경을 전달해 주었을 뿐 아니라, 이와 더불어 찬송가도 주었다. 오늘날 종교개혁이 계속 지속되면, 분명 교회가 하나님께 찬양하는 방법에서 나타날 것이다.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시편 67:4) 


조시 비스 박사(Dr. Josh Buice)는 조지아 주, 아틀란타 바로 서쪽, 더글러스빌의 Pray's Mill 침례 교회를 섬기고 있다. “G3 집회”의 창립 책임자이자, 신학 블로그(DeliveredByGrace.com)에 글을 쓰고 있고, 강해설교와 성서학, 지역 교회에 대하여 열정적이다. “남침례신학교(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설교 해석의 M.Div.와 D.Min. in expository preaching 학위를 받았다. 건강한 성서학과 교회론에 열정을 가지고, 이런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설교하고 집필하고 나누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카리(Kari)와 결혼하여 카리스(Karis), 존 마크(John Mark), 칼리(Kalli), 저드슨(Judson) 이렇게 네 명의 자녀가 있다. 사적으로는, 가족, 사냥, 달리기, 좋은 커피와 함께 하며 시간을 즐긴다. 이 글의 원문은 Churchleaders.com에 게시된 "6 Reasons Why the Church Is Not Singing"으로, 문화선교연구원에서 번역, 편집하여 한국교회에 소개한다.


  1. T. David Gordon, Why Johnny Can’t Sing Hymns, (Phillipsburg, New Jersey: P&R Publishing, 2010), 42. [본문으로]
  2. Mark Dever, The Deliberate Church, (Wheaton: Crossway, 2005), 120. [본문으로]

게 시 글 공 유 하 기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밴드

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미지 맵

    웹진/목회 다른 글

    댓글 0

    *

    *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