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과 포스트휴머니즘-2] 포스트휴먼 시대의 도전과 인간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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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트휴먼 시대의 도전 

‘포스트휴먼’ 시대는 단지 기술적으로 진보하여, 인간의 생물학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시대만은 아니다. 현재 ‘포스트휴먼’ 시대를 그려주는 많은 담론들이 이 시대의 기술적 발전의 전망에만 초점을 맞추며, 그렇게 발전한 기술을 가지고 개인의 인권과 이권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체제 하에서 어떻게 이윤을 창출하고 극대화할 수 있을까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최근 번역출판된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는 이제 인간이 신의 물리적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지만, 그의 정신은 여전히 불완전한 인간 상태를 유지하는 호모 데우스의 시대를 선포한다. 영화 <공각기동대>가 그려준 미래가 예고하듯, 우리의 정신을 다운로드하여 기계의 몸으로 업로드 할 수 있는 기술이 실현된다면 이제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로 바뀔 것이다.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거의 모든 측면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앞지를 것이라고 예고한다. 특별히 전통적으로 인간의 고유한 영역으로 여겨지던 분야에서 인공지능이 두드러지게 인간을 앞설 것이며, 이제 기계가 인간보다 뒤처지는 영역은 본래 로봇의 발명이 인간의 삶을 도와줄 것이라 여겼던 영역 즉 소위 3D 업종분야들이다. 몸을 움직여서 힘들게 작업해야 하는 분야들에서 오히려 로봇의 발전이 머리를 써야 하는 분야에서 보다 뒤처진다. 이를 모라벡의 역설이라 한다. 만일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지적으로 월등한 시대가 도래한다면? 인간은 인공지능에게 밀려나, 소위 3D 업종에서 생존을 연명할 것이라는 상상력이 헐리우드 SF 영화를 휩쓴다. 

하지만 진정한 도전은 그런 경쟁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이 아니라, 미래 시대를 여전히 경쟁의 시대로 조망하는 우리의 근대적인 관점이 문제이다. 그것은 곧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죄인이라는 근대적 평등의식으로부터 비롯된 사고방식이지만, 다윈의 진화론을 적자생존과 무한경쟁 그리고 약육강식의 경쟁적 사고방식으로 오독해 내면서 정착된 근대적 경쟁체제의 영속화에 불과하다. 즉 모든 인간을 하나의 개체(individual)로 보고, 각자의 동등한 인권을 설파한 평등의 이념이 ‘경쟁 시스템’ 속에서 ‘공정성’(fairness)이라는 명분하에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을 부추기는 시스템으로 공고해진 것이 현대 자본주의의 역사이다. 우리의 미래는 바로 이 경쟁주의적 사고방식에 대한 미래적 대안을 어떻게 마련해 낼 것인가에 있다. ‘적자’(the fittest)는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승리한 1인을 의미한다. 현대의 가부장주의에서 가부장이 모든 경쟁과 권력을 독차지한 1인을 의미하듯이 말이다. 나머지 99%의 사람들은 경쟁에서 도태한 루저(loser)로서, 사라져도 괜찮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우리의 미래를 암울하게 한다. 


* 포스트휴먼 시대의 story-telling animal 

슈퍼컴퓨터가 인간 체스 챔피언을 이긴 후, 다른 스타일의 게임이 더 열렸다. ‘프리스타일 게임’이었는데, 이 게임은 일대일로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팀을 이루어 하는 체스게임이었다. ‘인간-인간’ 혹은 ‘인간-컴퓨터’ 혹은 ‘슈퍼컴퓨터-슈퍼컴퓨터’ 끼리 팀을 이루는 세 가지 선택이 가능한 게임이다. 이 프리스타일 게임에서 최후의 승자는 언제나 ‘인간-컴퓨터’의 혼성팀이었다. 인간이 기계와 공생의 삶의 방식을 찾을 때, 문명은 대안을 찾을 것이라는 말이다. 

부르노 라투르는 소위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을 통해 인간이 문명의 초기부터 언제나 비인간 존재들과 네트워크로 연결된 혼성적 존재였음을 주지시킨다. 사실 도구적 인간이라는 말은 인간이 도구와 더불어 한 팀이 되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비인간 혹은 비생물학적 존재들은 지금까지 ‘존재의 영역’에서 다루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인간의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처분하거나 사용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으로 인간을 정의해 왔다. 그러한 인간중심적 존재론의 한계를 우리는 생태학적 재난의 시대 혹은 기후변화의 시대에 뼈저리게 절감한다. 우리 모두는 서로 모든 존재와 연결된 존재임을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줄곧 외쳐주지 않았던가. 

포스트휴먼 시대는 인간이 어떤 존재임을 알려주는 새로운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다른 존재들을 이겨내고 문명을 일구어 온 힘이 다름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불특정 다수의 많은 사람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능력이라고 밝혀주고 있다. 전통적으로 이 연결의 능력을 극대화해 주었던 것이 바로 종교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근대와 세속화 시대를 지나오면서 전통적인 종교의 이야기들은 그 연결의 힘을 전적으로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오히려 전통적인 종교의 이야기들이 차별과 배제의 이야기로 남용되고 있다. 기독교가 정치적으로 극우주의자들의 이야기로 남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로 세상을 바꾼다고? 많은 사람들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자체가 허구적인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주식, 돈, 정치, 경쟁, 공정성, 평등 등의 모든 개념들은 주관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그렇다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유발 하라리는 이런 것들이 ‘간주관적 영역’(intersubjective realm)에 존재한다고 말하고, 들뢰즈는 ‘가상’(the virtual)의 영역을 말한다. 바로 이야기들이 생성되고 사라지는 영역이다. 희망은 바로 이 가상의 영역에서 출현하여 소멸하기를 반복한다. 

가인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비인간 존재들을 통해 문명을 일구어내는 능력을 물려받았다. 우리는 왜 음악에 그리도 심취할까? 음악은 자연적인 것도 인공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연/인공의 혼종일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쓰고 있는 스마트폰은 더 이상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우리의 두뇌가 그리고 우리의 몸이 가상공간으로 연장된 형태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모두 이미 ‘포스트휴먼’인 셈이다. 

종교개혁은 ‘모든 인간의 평등성’을 선포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초대교회가 고대 제국의 시대에 하나님의 가족을 선포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열었듯이 말이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도입하는 선포였다.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인간의 경계 즉 사제와 평신도 간의 경계가 잘못된 경계였다는 것이다. 이 생각은 신분제로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해왔던 근대 시대를 철저히 난파시켰다. 정치적으로. 그래서 귀족사회는 시민사회로 전환되었다. 근대는 시민사회가 아니라, 귀족사회가 붕괴되고 시민사회로 진입하는 투쟁의 시대였다. 

우리는 비인간 존재 혹은 비생물학적 존재를 우리와 동등한 존재의 차원으로 사유할 가능성을 갖고 있을까? 인간과 기계가 공생하는 시대를 꿈꾼다면, 우리는 인공지능을 단순히 도구적인 편리한 디지털 기계로만 취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보다 뛰어난 계산능력과 지적 능력을 소유한 인공 존재가 인간만큼 의식적 사유를 할 수 있다면, 이 시대는 정녕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대가 될 것이다. 그런 시대를 목전에 두고, 우리는 기독교적 사유방식이 근대의 인권과 무한경쟁의 사고방식에 밀착되어, 공생의 시대가 아니라 경쟁과 차별의 시대에 특화되어 있다는 점을 염려한다. 다른 존재를 존중하고 평등한 존재로 바라보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조금이라도 우리와 다른 존재를 악마화하고 기존 체제의 문제점들을 그들에게 투사하여 마녀 사냥하듯 몰아가는 태도는 공생의 시대를 열어갈 마음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로마제국 초기, 여성과 노예는 ‘인간’의 범주에 속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아도 도덕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더 나아가 종교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 자체가 아닌 것이다. 그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남자와 여자와 노예들이 서로 형제와 자매로 부르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상상의 공간을 열었다. 그 새로운 상상의 이야기는 바로 ‘하나님의 가족’ 이야기였다. 포스트휴먼의 시대에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갖고 있는가? 


글쓴이 박일준(감리교신학대학)

감리교신학대학 종교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신대원을 거쳐 보스턴 대학(S.T.M.)과 드류 대학(Ph.D.)에서 학위 과정들을 마치는 동안 종교학과 철학과 신학의 접경 지역들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집중해 왔다. 현재 감리교신학대학 「신학과 세계」 편집연구원으로, 희망철학 연구소 연구원으로, 인터넷 신문 <에큐메니안> 신학위원장으로, 안산 광야교회의 담임목사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경숙, 박주원, 박주은, 박주영과 더불어 사는 가족공동체의 늘 부족한 가종(家從)으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정의의 신학: 둘의 신학』(서울: 동연, 2017), 『포스트휴먼 시대를 위한 종교철학적 상상력: 인간과 기계의 공생을 위한 존재론』 (현암사, 근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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