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빈의 문화칼럼] 한국 교회와 평화 이루기 2부









한국 교회와 평화

평화 이루기(peacemaking)를 위한 교회의 과제 -


임 성빈 원장 (문화선교연구원, 장신대 기독교와문화 교수)

 


. 평화 만들기를 향한 교회의 우선적 과제

 

1. 평화의 초월적 토대와 성격 확인하기

사실 초월을 인정하지 않는 화해는 자기중심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세상과 소통하며 기독교적 화해 비전의 초월적 특성을 세상에 설득할 책무를 가진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평화를 실현하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에 극복해야 할 거짓 복음은 도피의 복음혹은 번영의 복음이다. 이러한 종류의 신앙이나 신학의 문제는 사회갈등의 현실을 외면하면서 개인적인 안녕이나 물질적 축복만을 약속하고 추구토록 한다는 점이다. 결국 세계에 만연한 아픔에 주목하지 못하고, 진정한 평화가 없는 곳에서 거짓 평화를 말한다(8:11 참조). 이러한 값싼 복음에 미혹되면 그리스도가 선포하고 실천한 평화를 왜곡하게 된다. 여기서 피해야 할 평화 이루기의 잘못된 유형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그 첫째는 과거를 배제한 화해유형이다. 그것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값싼 은혜를 제공하여 과거의 교훈을 기억 못하게 한다. 둘째는 친교 없는 정의유형이다. 이것은 현재의 부정의를 유발하는 구조적 부정의에 대하여서는 민감하게 지적하면서도 오랜 역사적 적대세력이나 그 세력에 속한 구성원들에게는 평화로운 미래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여지를 배제함으로써 실제적으로는 갈등을 지속시키거나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각주:1]

이러한 함정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기억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발생하는 갈등의 현실도 직시해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의 신앙의 대상과 내용에 대하여 더욱 명료한 이해가 요청된다.

 

2. 평화의 초월적 토대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

평화 이루기를 위한 여정에서 한국교회의 주요 과제는 신앙의 사유화(privatization)[각주:2]의 극복, 신앙과 삶의 이원화 극복, 즉 초월적 신앙의 역사성 회복이다. 기독교 신앙이 세상의 사상들과 구별되면서 또한 세속적 세계관 및 가치관들에 대하여 근본적인 도전을 줄 수 있는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초를 두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게 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며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에게 토대를 두는 신앙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초월성과 보편성을 지니면서, 동시에 유한한 우리 인간들과 역사적 관계를 맺으신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삼위일체 되심에 주목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와 이 세상과의 관계하심, 즉 경륜에 대한 강조는 피조물들 사이의 일치와 하나님과 다른 피조물들과의 교제, 즉 평화로운 삶과 그러한 삶을 가능케 하는 존재양식의 토대이자 소망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기초하여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A doxological and trinitarian) 하나님 이해, 즉 삼위일체적 신론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인다운 삶, 즉 평화를 이루어가는 삶의 기초다.[각주:3] 이제 우리는 삼위일체적인 신앙을 살아냄으로써 하나님은 다른 만물들을 힘으로 억압하시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힘과 삶을 나눔으로써 공동체를 이루려 하시는 분임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능력(power)은 강제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창조적이며, 희생적이며, 다른 이들에게 힘을 불어 넣어 주는 사랑(empowering love)이다.”[각주:4] 이제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의 심연적 문법(the depth grammar of the doctrine of Trinity)”으로부터 보다 구체적으로 평화를 이루어가는 삶의 태도와 자세를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 “자기 나눔(self-sharing), 이웃 돌보기(other-regarding), 그리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사랑(community-forming love)”[각주:5]이 그것들이다.

 

3. 신앙인들의 응답- 탄식으로 시작하는 평화 이루기의 여정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구원의 부르심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우리를 성화로 이끄시는 성령께서 주도하심으로 시작되지만, 우리의 책임감과 구체적인 실천을 필요로 한다는 데서 상호응답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평화 이루기는 긴 여정이다. 이것은 업적, 행사, 전략, 프로그램과는 다른 차원의 과정이다. 또한 평화 이루기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여정이다. 이 말은 이 여정의 통제권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화 이루기의 주도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할 일은 하나님의 주도권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평화를 이루라는 그리스도의 대사로 신앙인 모두가 부름 받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하나는 연약한 인간으로서의 우리 존재이다. 평화 이루기의 여정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길고 힘들고 값비싼 대가를 요구하는 지난한 여정이다.[각주:6] 그러므로 교회는 평화의 여정을 기도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세상의 현실 때문에 억압당한 사람들, 피해 받은 사람들, 깊이 상심한 사람들의 기도는 일종의 탄식이다. 평화 이루기의 여정은 탄식의 훈련에 바탕을 둔다.[각주:7] 탄식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실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이다.

탄식을 배우는 것은 평화의 여정에 치명적 장애가 되는 교회의 분열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가 문제의 일부임을 인식하는 것이다.[각주:8] "때때로 우리는 회개 없는 화해를 선호한다.”[각주:9] 그러나 '회개 없는 은혜'가 값싼 은혜인 것처럼, '회개 없는 화해', 탄식 없는 화해는 값싼 화해다. 탄식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화해를 이룰 수없다는 힘든 사실을 깨닫는다. “화해는 항상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신약성경은 그 선물을 회개(metanoia)라 부른다. 탄식을 배운다는 것은 세상의 상처에 다가가 그 곁에 머무르면서 상처를 노래로 표현하고, 상처를 씻어주고, 고통에 찬 외침을 들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각주:10]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양식과 경륜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매우 관계적이며 동시에 관계의 상대방, 즉 이웃을 중심으로 그의 필요와 아픔에 민감한 삶을 제시한다. 이 사람은 현실을 통찰하며, 자신을 냉철하게 돌아보며, 이웃과 세상과의 화해를 통하여 평화를 이루어 가는 사람, 즉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4. 교회의 교회다움과 구조와 기능: 협의체적 교회의 회복

교회의 교회다움은 신앙인의 신앙인 됨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신앙은 일회적인 결단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인격을 형성하는 습관을 요구한다. 개인의 평화를 향한 개인적 차원에서의 인격 형성도 필요하지만, 더욱 큰 맥락에서 소통과 합의를 보장하기 위해 조직적 차원에서의 교회문화 형성의 과제도 수행되어야 한다.

평화의 여정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교회는, 무엇보다 복음에 기초한 교회 문화를 형성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 점에서 평화를 실천하고 선도할 교회는 협의체적인 성격을 가져야 한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대표적 협의체는 예루살렘회의였다.(15, 2장 비교 참조)

협의체는, 진리를 위한 논쟁 중에도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존중하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현실화된다. 그 결과, “진리에 대한 변화된 인식"을 갖게 되고, "서로를 결합시키는 진리, 연대하게 하는 진리"에 가까워진다.[각주:11] 이 때, 협의체 안에서는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배제하지 않고, 그것을 조정할 수 있고, 진리를 위한 논쟁을 억압하지 않고 그것을 중재할 수 있어야 한다.”

초기 교회 교인들이 생각과 의견이 달랐지만 이들이 공동체 의식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공동체 안에 성령께서 현존하심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혜사 성령의 도움을 받아 공동의 예배와 애찬식(2:11이하 참조)을 통해 하나의 공동체로 묶였다. 협의체적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예배와 성만찬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 예배는 이 세상의 의견들과 관점들을 넘어서는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해방이다. 성만찬에서 교회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화해하는 죽음의 현재를 기념한다.” 협의체는 화해의 가능성을 신뢰하는 데서 시작된다. 여기서 화해는 반대되는 입장을 타협적으로 조화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갈등을 공동체의 성장을 촉진하는 운동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각주:12]

협의체는 예배와 일상적 삶이 뗄 수 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이며, 협의체적 공동체는 새로운 진리에 대한 인식에 열려 있는 공동체이며, 삶을 함께하는 도상의 공동체이다.

협의체로서의 교회는 항상 성령의 현존을 희망한다. 성령을 통한 신뢰는 협의체적 교회 안에서의 구조로서 형제애적 구조, 즉 연대적이고 참여적 구조를 제시한다. 그러기에 교회 안의 갈등은 연대적이고 참여적인 구조 안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각주:13] 따라서 협의체적 교회는 참여하는 교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협의체적으로 산다. 교회 안에서는 진리에 관한 논쟁이 있어야 한다. 또한 그 진리에 관한 논쟁이 실천적인 결단으로 이어지도록 먼저 교회가 조직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성원들의 참여와 참여를 현실적으로 대리할 수 있는 대표제를 통해서 협의체가 된다. 모든 구성원들이 현실적으로 직접 참여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들이 교회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참여할 수 있도록, 또 교회의 몸을 이룬 지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모색되어야 한다.[각주:14] 이런 의미에서 총회와 공동의회 등이 마련된 것이다. 이러한 협의체적 구조와 기능은, 성령이 교회의 모든 교인들에게 주어졌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협의체적 결단은 교회의 적극적 수용을 필요로 한다.

협의체적 교회는 인간의 정치적 사회적 갈등의 한가운데서 공동체 의식을 위한 영향력 있는 힘을 행사해야 한다. 교회는 권력의 이데올로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며, 권력이 은폐한 사회의 이면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교회는 힘이 부족하여 자신의 표현하지 못하는 작은 사람들을 대변해야 한다. 이렇게 교회의 협의체가 인류 공동체에 봉사하게 됨으로써 교회는 평화의 도구로서 교회다운 교회가 되어간다. [3부에서 계속됩니다.] 

* 선교와신학 제38집(2016.02.)에 실린 글을 요약, 3부로 나눠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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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mmanuel Katongole, Chris Rice, 『화해의 제자도』, 40. [본문으로]
  2. Peter Berger, The Sacred Canopy: Elements of a Sociological Theory of Religion (Garden City, N.Y.: Doubleday, 1967), 133. 맥과이어,『종교사회학』(서울: 민족사, 1994), 401에서 재인용. 종교사회학적 의미에서 사유화는 세속화로 인하여 야기된 “분화된 어떤 제도영역들(예컨대 종교, 가족, 레저, 예술)이 지배적인 공적 영역(예컨대 정치적, 경제적, 법적)의 제도들로부터 격리되어 사적영역으로 퇴행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격리는 사적 영역의 규범과 가치가 공적 영역의 제도들의 운용과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사유화’와 ‘신앙과 삶의 이원화’는 동의어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후자가 전자에 비하여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을 노출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3. 위의 책, 408. [본문으로]
  4. D. Migliore, Faith Seeking Understanding (Grand Rapids, Michigan: Wm.B. Eerdmans Publishing Co., 1991), 63. [본문으로]
  5. 위의 책, 64. [본문으로]
  6. 위의 책, 68. [본문으로]
  7. 위의 책, 96. [본문으로]
  8. 위의 책, 106. [본문으로]
  9. 위의 책, 107. [본문으로]
  10. 위의 책, 115. [본문으로]
  11. 위의 책, 127. [본문으로]
  12. 위의 책, 129. [본문으로]
  13. 위의 책. 131. [본문으로]
  14. 위의 책, 13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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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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